레나테 울머에의해 쓰여졌으며 국내 마로니에북스에서 출판한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라는 대명사를 창조해낸 거장 예술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 7, 24~ 1939, 7, 14)의 작품 세계를 가볍게 맛보기해 볼 수 있는 책자이다.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 알폰스 무하는 그 엄청난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유명세를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순수한 예술의 세계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의 상업적 가치가 탁월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출판 예술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작가인 만큼 책자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크게 거부감이 없다. 그이 작품 세계와 관련한 글들도 흥미롭낟. 동서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그 매력에 빠져버리고마는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은 나 역시도 무척 좋아한다. 작년에는 그의 작품전이 국내에서도 치루워져 무척 뜻 깊었다. 

 아래는 알폰스 무하에 관한 위키백과의 글과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알폰스 마리아 무하(체코어: Alfons Maria Mucha [ˈalfons ˈmuxa]1860년 7월 24일 - 1939년 7월 14일)는 체코의 화가이며 장식 예술가이다.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무하는 모라비아의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에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1879년 으로 옮겨 무대 배경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1881년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모라비아로 돌아가서 프리랜스로 장식 예술과 초상화를 그렸다. 미쿨로프의 카를 쿠헨 백작이 흐루쇼바니 엠마호프 성과 벽화를 부탁한 뒤에 그의 그림에 감명받아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1887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Académie Julian과 Academie Colarossi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렸다. 1894년 Theatre de la Renaissance에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무하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가장 유명한 그의 전형적인 회화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 네오클라식 양식의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보다 고상하고 위엄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1906년 미국에 초대받아 1910년까지 있었다. 체코 공화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즈비로그 성의 거대하고 크리스탈로 된 큰 방안에서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그의 붓 아래에서 20개의 기념비적인 웅장한 작품이 나왔다. 슬라브 민족 역사에 있어서 변혁의 단계를 묘사한 것으로 특히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얀 후스의 설교> <그룬반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는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또한 곧 준공될 성 비투스 대성당의 메인 유리를 스케치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가 형성된 후에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의 창조에 몰두했다. 그의 재능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등을 디자인했다. 1908년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프라하에 이를 헌정했다. 당시의 프라하에서는 모든 <슬라브 서사시> 작품 전체를 전시할 만한 갤러리를 찾을 수 없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전쟁후에 일시적으로 모라비아 성에 일시적으로 출품하였다. 체코어로는 Moravsky krumlov로 1963년부터 관람이 가능했다. 그의 인생 말엽에 무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1930년 체코에서 그의 작품들은 낡은 기능주의 전성시대의 산물인 구식이며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번째 우표는 무하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하의 애국심은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독일의 적으로 간주한 명부에 포함할 만큼 유명했다.198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알폰스 무하는 비셰그라드의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무하의 작품세계는 프라하 박물관에 헌정되었고 슬라브 서사시 연작은 모라비아 크루믈에서 전시되었다. 또한 무하 삶의 초기 시대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던 <ИВАНЧИЦ>법원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세계의 많은 주요한 박물관과 화랑들에는 무하의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예전의 박람회 단지에서 멀지않은 프라하의<СТРМОВК>공원에 <슬라브 서사시> 전시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물의 건축 설계가 진행 중이다. 소행성 5122는 무하의 명성을 기려서 명명한 것이다.



사기》(史記)는, 중국 전한 왕조의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초기에는 《태사공서》(太史公書)로 불렸는데, 후한 말기에 이르러 처음 '사기'라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기원전 2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찬시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짓는다는 구상은 이미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때부터 존재했으나, 사마담은 자신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자 분개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책을 짓는 일을 완수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자신의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고대 위인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지금의 굴욕을 무릅쓰고서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에 몰두했고, 기원전 91년경 《사기》는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이 《사기》를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술이 《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선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손자 양운(楊惲)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 이전의 삼황(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한 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후(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세가(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후본기(呂后本紀)」라는,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유협열전」(遊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자객열전」(刺客列伝)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간의 추악한 권력다툼을 묘사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이나, 남색(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혹리열전」(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에 대해서도 「순리열전」(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안이한 영웅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악서(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초왕(楚王) 유우(劉宇)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합종연횡(合従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1] 또한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경서(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유지기(劉知畿)가 편찬한 《사통(史通)》 고금정사편(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사기》와 《한서》의 비교 분석이 많은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어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 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한편, 《사기색은》이 인용한 《죽서기년》 등과의 비교 작업에서 연대 모순 등의 문제점이 종종 지적되고 있다(예를 들면  왕가의 요와 합려의 세대간의 가계도 등).


 위는 사마천의 사기에 관한 위키백과의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중국은 그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 유구한 역사 만큼이나 불멸의 가치를 지닌 책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사마천의 사기 역시 유구한 시대를 초월한 불멸성을 가지고 있는 명작이다. 사마천은 스스로 정의를 행했음에도 궁형(궁형(宮刑)은 남/여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서, 남성은 생식기를 제거 (거세:去勢)하고, 여성은 을 폐쇄하여 자손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벌이다. 춘추전국시대에 행해진 이 형벌은 사형을 당하게 되는 죄인 (사형수)에게 사형과 궁형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사형을 선택하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반면 궁형을 택하면 그 사람의 모든 명예는 무시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궁형이 사형보다 더 큰 형벌로서 인식되었다. 사마천은 이 궁형을 당한 후에도 굴하지 않고 사기를 편찬했다.)을 당하고 그 상황에서도 의지를 잃지않고 정열을 쏟아 130권에 달하는 사기를 편찬했다. 사기는 중국 고대, 은주 시대에서부터 사마천의 당대인 한대에 이르는 역사와 함께 중국과 중국 주변을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역사서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문학적 가치도 높이 평가받고있다.

 이런 중국의 명서 사기를 꼭 한 번 재대로 읽어보고자하는 열망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지하철역 간이 서점에서 단돈 7,000원에 판매되고 있는 사기를 발견하고 구입해 읽게 되었다. 이 사기는 130권에 달하는 사기의 내용을 사기와 사기 열전 두 권에 담아내고 있는 만큼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책만의 장점도 적지않다. 사기 전체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한 번 간단히 훑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또한 단 한 권 책자임에도 500페이지 분량은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한권에 방대한 내용의 사마천의 사기를 담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은 흔적이 보인다.

 최근에 주위에서 역사서를 읽는 이를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눈 앞에 보이는 실질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일 수도 있겠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에 제공할 교훈을 찾는다라는 말이 많이 쓰이긴 하지만 글쎄....

 나는 역사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렇다고 과거 이야기에서 큰 교훈을 얻어 실질적인 이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흥미와 재미, 지식욕의 자극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조차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100년이 넘는 역사를 뛰어넘어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선사하고 있는 사기,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앞으로 꼭 한 번 더욱 깊이있게 다루어진 사기를 읽어보고 싶다.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은 분류를 구분하자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기계발서라는 장르로 불릴 수 있는 서적이다. 그중에서도 성공이나 처세, 리더쉽 등 내가 가장 관심없어하는 분야를 주로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우연한 기회에 읽게된 이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은 생각보다 깊은 인상을 안겨주었다. 대체로 에세이나 자기계발서가 얕은 경험적 지식에 의한 시스템적인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작용과 반작용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면 데일 카네기가 쓴 인간관계론에서는 좀 더 철학적인 수준의 인간 소통법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성공적인 인간 소통법을 바탕으로 성공에 이르는 기본을 다질 수 있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 성공의 가치관은 실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점의 책장을 가득 매우고 있는 소위 자기계발서라는 책자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가치관만을 강요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카네기는 성공이 무엇이라고 딱히 규정하기 보단 자신이 원하는 성공에 이르기 위해 성공적인 인간관계가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기본을 다져놓을 수 있는 철학적 사고관을 제시하고 있다.

 가끔은 우연히 손에 든 책자가 깊은 인상을 남기곤 한다. 때론 그 책자가 취향 밖의 내용을 다루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런 점에서 취향의 편협함은 많은 새로운 자극의 기회를 발로 차 버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정말로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되었던 카네기 인간관계론, 재미있고 특이한 책이었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장대한 서사시의 발단이 되었던 모험가 호빗 빌보의 첫 여정 이야기 영화 호빗(The Hobbit)의 그 두 번째 이야기를 드디어 감상할 수 있었다. 개봉한 지는 꽤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결국 그토록 기대하던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The Hobbit : The Desolation of Smaug)를 즐길 수 있어 너무도 기뻤다. 기다림 만큼이나 큰 보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7년 J.R.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ein, 1892.1.3~1973.9.2)에 의해 창작된 소설 반지의 제왕의 모체가 된 이야기가 바로 호빗, 그리고 이 호빗이 영화 반지의 제왕의 감독 피터 잭슨에 의해 2012년 겨울 영화화 되어 총 3편중 첫 편이 상영된 이후 약 1년만에 그 두번째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사실 영화의 원작 소설 호빗은 톨킨이 자신의 아이들의 잠자리를 위해 지어낸 이야기가 우연히 출판되어 큰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이후 성인층의 독자를 겨냥하여 호빗의 세계관을 확장한, 소설 반지의 제왕을 낳은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몇몇 불후의 명작은 역시 우연찮은 운명의 도움을 받기도 하나보다. 이후 톨킨 소설의 광팬인 피터잭슨에 의해 다시 창조된 영화 반지의 제왕 3부작이나 영화 호빗 역시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영화 호빗은 원작인 소설 호빗과 상당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소설 호빗이 무척 동화적인 이야기 임에 비해 영화 호빗은 반지의 제왕의 분위기에 더욱 가깝게 거대한 스케일, 장엄함, 액션이 가미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원작 소설 호빗의 아기자기함과 섬세한 순수함도 부드럽게 녹아들어가 있다. 또한 반지의 제왕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위해 원작에 등장하지 않는 반지의 제왕 인물들이 등장하며 스토리의 연계를 강화했다. 이로인해 티없이 맑고 깨끗한 아기자기한 동심의 이야기는 장대한 한 편의 서사시로 탈바꿈 되었다. 

 주인공 호빗 빌보 베긴스의 캐스팅은 실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의 인기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 홈즈의 동료이자 친구로 등장한 왓슨 역을 멋지게 연기한 마틴 프리만, 그가 연기하는 빌보는 작고 약한 호빗이지만 재치와 용기, 순수함과 모험심으로 거대한 역경을 슬기롭고 유쾌하게 헤쳐나가는 원작의 빌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독특하고 개성있으며 재치있고 위트있는 호빗 빌보 베긴스의 세세한 몸동작과 표정, 대사를 연기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재미있다. 특히 조그만 호빗 빌보가 거대하고 강대하며 그 무엇보다 공포스런 존재인 식인 드래곤 스마우그와 마주하는 장면은 영화의 최고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드래곤 스마우그! 이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믿기 힘들정도로 뛰어난 표현은 이 영화의 최고의 성공이다. 그 거대함과 강대함, 위압감과 공포감을 정말로 멋지게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드래곤(Dragon, 대체로 용(龍)이라 칭하지만 동양의 용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드래곤이라 표기하겠다.)은 대체로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도마뱀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피부를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로 덮고 있는 실로 강대한 존재이다. 박쥐의 날개와 비슷한 모양을 한 거대한 날개로 하늘을 날고 입에서는 고열의 불을 내뿜을 수 있다. 대체로 불멸의 시간을 살며 높은 경지의 지성을 가지고 있지만 흉포하고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반짝이는 물건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의 보물에 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스마우그는 이런 유럽 신화의 드래곤이 그대로 살아나온 듯한 모습으로 표현되어있다. 때문에 인간 아이의 키밖에 되지 않는 호빗 빌보와의 대면 장면은 너무도 흥미롭기만 하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스마우그 목소리 연기를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 홈즈로 등장한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맡았다는 점이다. 빌보 역의 마틴 프리만과 함께 두 영국인 배우의 인연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홈즈와 왓슨으로서, 빌보와 스마우그로써!

 원작 소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영화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에는 원작에는 등장하지 않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했던 인물이 있는가 하면 새로 창조된 인물들도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한 여성 앨프 전사 타우리엘이다. 한 때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성황리에 종영된 미국 드라마 로스트의 여주인공을 연기했던 에반젤린 릴리가 타우리엘 역으로 등장한다. 금발로 대표되는 앨프 답지 않은 붉은 머리칼과 13인의 드와프 원정대의 일인 킬리와의 관계가 충격적이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 최고의 인기 캐릭터였던 레골라스와의 관계 역시도!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 역시 전작 호빗 뜻밖의 여정 못지 않게 기대에 충분히 보답해준 영화였다. 긴 기다림의 간절함을 충분히 보상해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더더욱 심해져 가는 원작 소설과의 차이에 원작 팬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만 원작을 좋아하는 나의 경우 피터잭슨이 재 구성해낸 호빗 역시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2014년 겨울 개봉으로 예정되어 있는 영화 호빗의 마지막 이야기를 기다리는 설램 조차도 즐겁기만 하다. 



2012/12/20 - [즐거운 취미와 문화/즐거운 영상물들] - 호빗 뜻밖의 여정! 반지의 제왕의 호빗들이 돌아왔다!


2012/01/19 - [즐거운 취미와 문화/독서는 마음의 양식] - 반지의 제왕 원류 호빗의 원서를 읽다! The Hobbit


2011/12/02 - [즐거운 취미와 문화/독서는 마음의 양식] - 반지전쟁 오래된 반지의 제왕 번역본 The Lord of The Rings



    



1937년 J.R.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ein, 1892.1.3~1973.9.2)에 의해 창작된 소설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첫 편 반지 원정대(The Fellowship of the Ring)가 해당 소설의 극성 팬이자 영화 감독인 피터 잭슨(Peter Jackson)에 의해 2001년 처음 성공적으로 영화화된 지도 벌써 12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반지의 제왕의 마지막 편 왕의 귀환(The Return of the King)이 역시 감독 피터 젝슨에 의해 2003년 영화화 된지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당시 영화화 되기 오래전 톨킨의 반지의 제왕(당시 한국판 완역본 서명: 반지전쟁)을 읽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매력에 흠뻑 매료되어 있던 나에게 반지의 제왕 영화화 소식은 실로 놀라운 자극이었다. '소설의 내용을 혹여 많이 손상시키지나 않았을까?' 라는 우려반 기대반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던 나는 3시간이 넘는 런닝 타임 동안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어가 정신없이 호빗들과 모험을 함께하며 시간 가는줄을 모르고 있었다. 영화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순간 모험을 끝내야 한다는 아쉬움과 영화의 여운으로 쉽게 극장 의자를 나서지 못했을 정도였다. 내가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든 장면들이 피터 잭슨의 영화에 그대로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인물 하나하나에서 장면 하나하나까지 어찌 그리도 내가 상상했던 그런 모습이 그려져 있던지 노라울 따름이었다. 피터 잭슨 역시 나 처럼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의 광적인 팬이었음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10여년전 받았던 감동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그대로 남아있다. 반지의 제왕 전편을 DVD로 소장해 가끔 심심하면 그 감동에 다시 빠져보곤 하였다. 그러던 중 반지의 제왕의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호빗(Hobbit)이 다시 피터 잭슨의 손에 의해 영화화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희열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톨킨이 자신의 아이의 잠자리에 들려주기 위해 창작해낸 소설 호빗은 반지의 제왕의 모체가 된 소설이다. 때문에 반지의 제왕보다 훨씬 뒤늦게 읽게된 소설 호빗은 좀 더 동심이 살아있는 소설이었다. 반지의 제왕 첫 편의 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프로도의 삼촌 빌보 배긴스의 첫 모험을 다루고 있다. 우연히 갠달프와 13명의 난쟁이(Dwarf,드와프, 사실 Dwarf를 국내에서는 난쟁이라는 단어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Dwarf는 상상속의 한 종족을 뜻하는 용어로 고유명사에 가깝다. 당연히 드와프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더 옳은 선택이 아닐까?)와 함께 모험을 떠나면서 겪게되는 멋진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 이 모험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집인 샤이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평범한 호빗 빌보는 평생 모험을 사랑하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모험에서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반지를 빌보가 우연히 손에 넣게 되는 장면도 등장한다. 그리고 또 한명의 중요한 캐릭터 골룸이 처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영화 호빗 뜻밖의 여정(The Hobbit Unexpected Journey)의 시작은 전작 반지의 제왕의 첫편 반지원정대의 첫 장면빌보의 생일 파티 준비에서 빌보가 회상을 시작하며 전개된다. 과거 반지의 제왕에 대한 추억을 되세길 수 있도록 천재 감독 피터 잭슨 본인의 창작력으로 멋지게 표현해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10여년 전의 반지의 제왕에서도 보여주었듯 영화 호빗 역시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톨킨이 창조한 세계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내고 있다. 상상속의 종족들과 용, 괴물들, 마법과 아름다운 자연들 너무도 완벽하게 스크린에 담겨있다.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앞서도 말했듯 감독 피터 잭슨은 톨킨 소설의 골수 팬이다. 그러한 만큼 그가 표현하는 톨킨의 세계는 너무도 섬세하다. 엘프와 드와프, 오크와 고블린, 그리고 하플링인 호빗의 표현은 정말로 완벽에 가깝다. 아름다운 뉴질랜드의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호빗, 드와프, 인간이 함께 하는 모험은 한시도 눈을 땔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은 또 한명의 주인공 회색의 마법사 갠달프를 연기한 이안 맥컬런(Ian McKellen)의 노화이다. 이 이야기는 반지의 재왕의 60년 전의 이야기로 당연히 인간인 갠달프가 젊었을 적의 이야기 이다. 실제로 반지의 제왕 첫편 반지 원정대 첫 부분에서도 늙은 갠달프가 절대 반지를 지녀서 노화가 더뎌진 빌보 배긴스를 보고 늙지 않았다고 놀라지만 사실 영화상으로 더 놀라운 것은 갠달프다.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일찍 노화하고 60년 동안 조금 젊어진 것일까? 하지만 마법사 갠달프를 완벽하게 연기해낸 이완 맥컬린을 역시 늙어버린 반지의 제왕 빌보를 호빗에서 젊은 배우로 대체하듯 대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갠달프=이완 맥컬린이라는 공식이 영화 팬들에게는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 생각하면 더 놀라운 것은 다른 배우들이 10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늙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에 등장했던 앨프족을 연기한 배우들은 늙기는 커녕 더 젊어진 느낌이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이는 앨프족의 불멸성을 생각하면 무척이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젊은 빌보 배긴스를 연기한 영국의 배 마틴 프리만(Martin Freeman)의 연기력은 실로 탁월하다. 평범하지만 누구보다 재치있고 모험을 사랑하는 빌보의 젊은 시절을 너무도 멋지게 소화해 내었다. 최근 이 배우는 소설 셜록 홈즈를 현대로 각색한 영국의 TV 시리즈 셜록(Sherlock)에서 셜록 홈즈의 친우 닥터 존 왓슨으로 등장해 개성 강한 연기력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였다. 호빗으로 변신한 그는 바로 하플링 호빗 빌보 배긴스 그 자체였다. 뜻밖의 여정은 빌보의 첫 모험의 전반부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의 런닝 타임이 3시간이 조금 안 될 정도로 길다. 그만큼 그들의 여정을 정말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역시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는 동안의 시간이 감동을 되새기기에 모자를 정도로 훌륭하게 제작된 영화다. 다음 편이 몹시도 기대되어 기다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제목 : The Hobbit(호빗)
저자 : J. R. R 톨킨(톨킨, John Ronald Reuel Tolkien, J. R. R. Tolkien, 1892. 1. 3 ~ 1973. 9. 2, 이하 톨킨) 
권수 : 1권 종결


 너무도 유명한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의 원작자 '톨킨'! 사실 이 '반지의 제왕'에는 그 앞선 이야기를 다룬 '호빗'이라는 작품이 있다. 실제로 국내에서 이 작품이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이 작품이 없었다면 아마도 '반지의 제왕'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빗'은 톨킨이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이야기가 우연히 출판사 직원에게 알려져 출판되면서 어린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많은 호응을 얻으며 불후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처럼 호빗의 성공에 힘입어 출판사의 요청에 톨킨이 10년 동안 집필한 작품이 바로 반지의 제왕이다.
 내용은 반지의 제왕 첫 편에 등장하는 프로도 베긴스의 삼촌 빌보 베긴스의 모험이야기이며 골룸과의 첫 대면 절대반지를 빌보가 소유하게 된 이야기등이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을 좋아한다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국내 번역본도 읽어 보았지만 이번에 도전할 작품은 영국판 원서다. 이미 내용도 알고 있으니 천천히 영문을 해석해가며 읽어볼 생각이다. '독서는 마음의 양식' 카테고리에 처음으로 아직 읽지 않은 원서를 소개하게 되는 것 같다. 일종의 '꼭 완독해야지!'라는 각오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완독하면 내가 읽어본 7번째 영문 원서가 될 것 같다. 나머지 6권은 미국식 영어로 쓰인 책이었지만 말이다.  

 
 또 하나 이야기 거리가 될 내용을 이 책의 뒷면에서 찾을 수 있다. COVER ILLUSTRATION BY J.R.R TOLKIEN !! 책 표지의 일러스트는 톨킨 본인이 직접 그린 것이다. 책 안에는 몇몇 일러스트가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톨킨이 그린 것이다. 스캔해서 보여주고 싶지만 책이 손상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이 일러스트만으로도 소장 가치가 충분한 원서다. 영국 파운드 가격은 7.99, 우연찮게 9,500원에 구입하였는데 영국 현지가보다 무척 싼 가격이다.  

 


제목 : 바이킹(Viking)
저자 : 팀 세버린(Tim Serverin, 본명 : Timothy Serverin, 1940~)
권수 : 총 3권 완결 1권 - 오딘의 후예, 2권 - 의형제, 3권 - 왕의 남자


 바이킹이란 800~1,050년 사이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생활했던 민족을 뜻한다. 무역과 약탈로 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해양 활동을 활발히 하였으며 한 곳에 정착하여 생활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최근 1,000년 경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당시 이주까지 이루어졌다는 설이 유력하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빈란드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설 '바이킹'은 동명의 제목에 알 수 있듯이 이 바이킹들을 이야기거리로 하고 있다. 소설 등에 자주 사용되는 작가의 상상력 즉, '허구'라는 의미의 '픽션(Fiction)'과 역사서에나 아울릴 단어인 '사실'이라는 의미의 '팩트(Fact)', 이 두개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를 결합해 '팩션(Faction)'이라는 단어로 이 소설 바이킹을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이 '바이킹'이라는 소설은 당시 북유럽을 무대로 활동했던 바이킹의 이야기를 너무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이 소설의 작가가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던 작품이 아닌가 한다.

 '바이킹'의 작가 팀 세버린의 정확한 직업은 모험가라고 할 수 있다. 지리학과 역사학을 전공하던 팀 세버린은 옥스포드 재학 시절 이륜 자동차(motorcycle)을 타고 과거 마르코 폴로의 여행 경로를 따라 모험을 펼쳤으며 유명한 켈트족 모험가 브랜던의 자취를 따라 가죽 보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 후로도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을 모험하였으며 그의 모험 기록들은 디스커버리나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의 유명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방영되며 모험 다큐멘터리의 고전이 되었다고 한다. 2005년에는 그가 연구한 다양한 북유럽 사가(Saga)들을 바탕으로 바이킹 시대의 말미를 섬세하게 표현한 소설 바이킹을 출판해 좋은 반응을 얻었고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하며 그의 다양한 모험과 지식을 바탕으로한 강의를 하고 있으며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고정 필자로 일하고 있다.

 바이킹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남쪽 유럽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독자적인 북유럽 문화를 구축하고 살아가던 민족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박진감있게 펼쳐나간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리스 신들 못지 않게 멋진 매력을 가지고 있는 북유럽 신들의 이야기가 버물어진 북유럽 민족의 생생한 이야기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바이킹, 토르길스의 모험 행적을 쫒아 정말 재미있게 펼쳐진다.
  


  J. R. R 톨킨(John Ronald Reuel Tolkein)의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은 원래도 세계적으로 상당히 유명했지만 피터 잭슨의 성공적인 영화화 이후 지금은 국내에서도 거의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학자이자 작가인 톨킨이 1954년에 발간한 이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작품성을 높게 평가받으며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접한 것은 1997년 경 국내 번역본인 반지전쟁을 통해서였다. 현재 반지의 제왕 번역본들은 상당히 많은 권수로 판매되고 있지만 당시의 반지전쟁은 3부작이었던 원작과 같이 3권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당시 이 책을 읽을 때 느낀 것은 단순한 재미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신비로움과 경외감? 또는 톨킨의 무한한 상상력에 대한 존경심으로 책의 마지막장 까지 손을 놓지 못했던 것 같다. 불멸의 명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오래된 책 역시 지금 펼쳐보아도 순간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게 되는 마력을 보여준다. 
  어쩌면 나는 피터 잭슨의 영화보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어보았기 때문에 영화가 더욱 재미있었는지도 모른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을 봤을 때 가장 놀랐던 점은 원작을 너무도 잘 표현했다는 점이었다. 당시 책을 읽으며 머리속으로 그려졌던 반지전쟁 속의 인물, 배경, 분위기 등이 정말 그대로 영상에 담겨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관람했던 것 같다. 피터 잭슨 역시 나 처럼 이 작품의 광적인 팬이었다니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3부작의 권당 가격이 5,500원이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개인적 의견을 하나 적어보자면 '
The Lord of The Rings'의 한국 번역 제목으로는 반지의 군주가 가장 어울리지 않나한다. 사실 제왕이라면 'Emperor'나 'King'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까? 중세시대의 'Lord'라는 개념은 군주에 가까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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