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는, 중국 전한 왕조의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저술한 중국의 역사서이며, 중국 이십사사의 하나이자 정사의 으뜸으로 꼽힌다. 초기에는 《태사공서》(太史公書)로 불렸는데, 후한 말기에 이르러 처음 '사기'라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 「본기(本紀)」 12권, 「표(表)」10권, 「서(書)」8권, 「세가(世家)」30권, 「열전(列傳)」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서 그 서술 범위는 전설상의 오제(五帝)의 한 사람이었다는  (기원전 2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말의 전한 무제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그 서술 방식은 후대 중국의 역사서, 특히 정사를 기술하는 한 방식의 전범(典範)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으로서도 큰 가치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찬시기는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로 추정된다.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짓는다는 구상은 이미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때부터 존재했으나, 사마담은 자신이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자 분개하며 아들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책을 짓는 일을 완수해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마천은 그러한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의 편찬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99년, 사마천은 흉노에 투항한 자신의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투옥되고, 이듬해에는 궁형에 처해졌다. 옥중에서 사마천은 고대 위인들의 삶을 떠올리면서 자신도 지금의 굴욕을 무릅쓰고서 역사 편찬을 완수하겠다고 결의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97년에 출옥한 뒤에도 사마천은 집필에 몰두했고, 기원전 91년경 《사기》는 완성되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딸에게 이 《사기》를 맡겼는데, 무제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기술이 《사기》 안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선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마천의 손자 양운(楊惲)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대(唐代)에 사마천의 후손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을 참조하여, 과거 사마천이 서술하지 않은 오제 이전의 삼황(三皇) 시대에 대해서도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짓고 「서」(序)도 곁들였다.


『사기』의 내용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사상은 바로 「하늘의 도라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하늘의 도리, 즉 인간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다루고 있는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의인(義人)임에 틀림없는 백이와 숙제가 아사(餓死)라는 초라한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서는 사마천 자신이 과거 친구이자 이릉의 불가피한 항복을 변호했던 올바른 행동을 하고도 궁형이라는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한 비통함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있다.

그가 《사기》를 집필하던 시대 한 왕조는 무제에 의한 유교의 국교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도 제후(諸侯)가 아닌 그를 굳이 세가(世家)의 반열에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사기》의 기술은 유교 사상이 주가 되는 와중에 다른 사상도 가미되어 있는데(사마천 자신이 도가에 특히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이것은 「사실」을 추구한다는 역사서 편찬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반진(反秦) 세력의 명목상의 영수(領袖)였던 의제의 본기를 짓지 않고 실질적인 지배자인 항우의 본기를 지은 것도, 여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하고 마찬가지로 「여후본기(呂后本紀)」라는, 여후의 본기를 지은 것도, 그러한 자세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王侯)를 중심 대상으로서 서술하면서도 민간의 인물을 다룬 「유협열전」(遊侠列傳), 「화식열전」(貨殖列傳), 암살자의 전기를 다룬 「자객열전」(刺客列伝) 등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에 대한 기술도 많다.

또한 당시 무제와 외척간의 추악한 권력다툼을 묘사한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이나, 남색(男色)이나 아첨으로 부귀를 얻은 자들을 다룬 「영행열전」(佞幸列傳), 법률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리며 사람들을 괴롭혔던 관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혹리열전」(酷吏列傳)과 더불어 법률을 가지고 사람들을 올바르게 이끌었던 관리들에 대해서도 「순리열전」(循吏列傳)으로 정리하는 등, 안이한 영웅 중심의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는 유연하고 다양한 시점유지도 눈여겨볼 점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한의 숙적이었던 흉노를 비롯한 주변 기마민족이나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논평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만을 담담하게 쓴다는 태도로 임하고 있다.

이러한 사마천의 태도는 유교가 중국 사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종종 비판 대상이 되었다. 《한서》를 지은 반표의 경우 사마천이 건달이나 졸부 같은 인물을 사서에서 다루고 유교를 경시하며 도교에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며 비판했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는 여자인 여후를 본기로서 서술했다며 비난하였다. 《사기》를 일종의 악서(惡書)로 보는 시점은 몹시 일찍부터 존재했는데, 성제 때에 제후인 초왕(楚王) 유우(劉宇)가 한 조정에 《태사공서》를 요구했는데, "옛날의 합종연횡(合従連衡)이며 권모술수가 자세히 담겨 있는 책이라 제후들에게 읽게 할 책이 아니다"라는 의견이 나와 결국 허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1] 또한 촉한의 초주(譙周)는 사서의 편찬은 경서(經書) 즉 유교 서적에만 의거해야 하는데 《사기》는 그러지 않고 제자백가의 설까지 인용했다며 비난하고, 《고사고》(古史考) 25편을 지어 유교 경전에 비추어 《사기》의 오류를 교정하기도 했는데, 《고사고》는 훗날 당대에도 《사기》를 읽을 때면 함께 읽히곤 했음을 당대 유지기(劉知畿)가 편찬한 《사통(史通)》 고금정사편(古今正史篇)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사기》와 《한서》의 비교 분석이 많은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역사 서술을 위한 간결하면서도 힘찬 문장은 「문성(文聖)」 또는 「백전노장의 군대 운용」과 같은 것으로 격찬받았다. 특히 「항우본기」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사로서 기술된 당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본 정보는 섬세한 기술로 당시의 생활이나 습관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서(書)」의 내용은 전한 시대의 세계관이나 정치, 경제, 사회 제도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또한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고, 이러한 지방의 당시를 알기 위한 귀중한 단서가 되어 있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 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다.

한편, 《사기색은》이 인용한 《죽서기년》 등과의 비교 작업에서 연대 모순 등의 문제점이 종종 지적되고 있다(예를 들면  왕가의 요와 합려의 세대간의 가계도 등).


 위는 사마천의 사기에 관한 위키백과의 내용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중국은 그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 유구한 역사 만큼이나 불멸의 가치를 지닌 책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사마천의 사기 역시 유구한 시대를 초월한 불멸성을 가지고 있는 명작이다. 사마천은 스스로 정의를 행했음에도 궁형(궁형(宮刑)은 남/여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서, 남성은 생식기를 제거 (거세:去勢)하고, 여성은 을 폐쇄하여 자손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벌이다. 춘추전국시대에 행해진 이 형벌은 사형을 당하게 되는 죄인 (사형수)에게 사형과 궁형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사형을 선택하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반면 궁형을 택하면 그 사람의 모든 명예는 무시되었다. 따라서 당시에는 궁형이 사형보다 더 큰 형벌로서 인식되었다. 사마천은 이 궁형을 당한 후에도 굴하지 않고 사기를 편찬했다.)을 당하고 그 상황에서도 의지를 잃지않고 정열을 쏟아 130권에 달하는 사기를 편찬했다. 사기는 중국 고대, 은주 시대에서부터 사마천의 당대인 한대에 이르는 역사와 함께 중국과 중국 주변을 아우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는 역사서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 문학적 가치도 높이 평가받고있다.

 이런 중국의 명서 사기를 꼭 한 번 재대로 읽어보고자하는 열망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지하철역 간이 서점에서 단돈 7,000원에 판매되고 있는 사기를 발견하고 구입해 읽게 되었다. 이 사기는 130권에 달하는 사기의 내용을 사기와 사기 열전 두 권에 담아내고 있는 만큼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책만의 장점도 적지않다. 사기 전체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한 번 간단히 훑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하겠다. 또한 단 한 권 책자임에도 500페이지 분량은 생각보다 많은 내용을 담아내고 있다. 한권에 방대한 내용의 사마천의 사기를 담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은 흔적이 보인다.

 최근에 주위에서 역사서를 읽는 이를 본 적은 없다. 아마도 눈 앞에 보이는 실질적인 이득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일 수도 있겠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에 제공할 교훈을 찾는다라는 말이 많이 쓰이긴 하지만 글쎄....

 나는 역사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렇다고 과거 이야기에서 큰 교훈을 얻어 실질적인 이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흥미와 재미, 지식욕의 자극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조차도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2100년이 넘는 역사를 뛰어넘어 나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선사하고 있는 사기, 어찌 재미있지 않겠는가?! 앞으로 꼭 한 번 더욱 깊이있게 다루어진 사기를 읽어보고 싶다. 




 나는 역사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유럽 역사사에서 로마의 이야기는 너무도 매력적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책에서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도 로마였으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정말 깊이 빠져들어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만큼 로마의 이야기는 다양한 매체에서 다루어지는 인기 소재라고 할 수 있다. 

 
 TV 시리즈 로마(Rome)은 영국의 BBC, 미국의 HBO, 이탈리아의 RAI, 세 개의 걸출한 방속국이 손잡고 만든 대작 드라마이다. 총 22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드라마는 정말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역사속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인 로마를 다루고 있으며 역사(실제 정설화된 역사적 사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와 픽션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보여준다. 당시 로마의 현실을 작은 소품 하나하나까지 너무도 리얼하게 표현해 몰입도가 상당히 높다. 역사속 유명한 인물들 뿐 아니라 로마를 살아가던 평범한 이들, 군인, 노예, 유태인들의 이야기까지 무척 다양하면서도 섬세한 등장인물들의 표현이 압권이다. 장점을 찾자면 끝도 없는 드라마이지만 리얼한 로마의 모습을 표현하다보니 잔인한 장면이나 수위가 꽤나 높은 선정적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여러모로 역사에 관심 깊은 어린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드라마이기도 하지만 이런 점에서 이는 불가능 할 것 같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을 꼽자면 역시 너무도 리얼하고 섬세하게, 또한 개성적으로 표현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역사적 유명인들이 등장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인물 두 명은 무명의 두 로마 군단병이라는 점도 무척 흥미롭다. 로마 픽션에서 이 두 인물이 역사적 사실에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루시우스 보레누스 : 갈리아 지방을 정벌중인 시저의 군단 소속 평민 백부장이다. 귀족이 아닌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로마 체제를 무척 숭배한다. 강직하고 책임감이 강하지만 성격이 불같고 분노 이외에는 감정 표현에 서툴다. 10년 가까이의 갈리아 원정에서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극 내내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엄청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 풀로와 둘이라면 한개 군단이라도 두렵지 않을 정도!


  타이투스 풀로 :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이 바로 타이투스 풀로이다. 루시우스 보레누스 소속 보병대의 일원으로 자유분방하고 폭력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보레누스와는 처음부터 악연으로 시작하지만 점점 서로의 관계가 단순한 군인으로서의 유대관계 이상으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유쾌한 성격이지만 엄청나게 강인하며 로마 군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무척 강하다. 


  줄리어스 시저 : 내가 본 영화속 시저 중 최고의 시저!특유의 거만함, 카리스마, 명석함!무엇하나 실제 시저에 떨어지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시저의 갈리아 원정막바지에서 시저가 암살된 후 젊은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잡기 까지 기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 : 로마의 제일 시민이 존엄자 아우구스투스이자 허울뿐인 공화정 로마를 로마 제국으로 바꾸어 놓은 로마제국 초대 황제다.
 로마의 평화를 이끈 장본인다. 이 드라마에서는 유년기와 청년기 옥타비아누스를 연기하는 인물이 다른데 유년기 연기가 더욱 인상적이었다. 어릴적은 단순한 명석함과 나약함이 잘 어울어져 있었다면 청년기에는 강인함과 냉철함이 보태어진다. 


  아티아 : 옥타비아누스의 어머지이자 시저의 조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치 않는 잔혹함을 보이면서도 여인으로서의 나약함도 함께 가지고 있는 실로 묘한 인물이다. 로마의 역사는 남자들만이 만든게 아닌 여성들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했을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로마 여성들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 인물이다. 브루투스의 어머니이자 시저의 정부, 세빌리아와의 암투가 볼 만 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 시저의 오른팔에서 옥타비아누스와의 삼두 정치,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연인, 역사속 이야기만큼이나 드라마 속에서도 다이마닉한 삶을 보여준다. 군인 출신 정치가인만큼 군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 오만함과 난폭함과 자유 분방함이 특징이다. 역시 어떻한 작품 속 안토니우스 이상의 멋진 연기를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 : 이집트의 왕족 클레오파트라! 이야기 후반부 부터 등장해 이야기 마지막까지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준다. 전대미문의 클레오파트라라고나 할까? 이야기 중간 타이투스 풀로, 루시우스 보레누스와의 만남에 관한 에피소드는 정말 실소를 자아내는 재미를 선사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시저의 연인에서 안토니우스의 연인으로,




 마르쿠스 브루투스 : 시저의 정부 세빌리아의 아들이자 시저의 양자같은 존재였지만 여러 원로와 작당하고 원로원 회의장에서 여럿이서 시저 한명을 난도질해 암살한다. 역사적으로 이 당시 원로원들과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며 너무도 허둥대서 서로를 상처입히고 브루투스 자신도 상처를 입었다고 하는데 이 장면이 무척 잘 표현되어 있다. 배덕과 암살로 얼룩져 있지만 극중에서는 단지 나약하고 고뇌하는 인물로 표현되었다.


 이 밖에도 아티아의 사주를 받아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맏하 하는 유태인이라던지, 보레누스의 가족들의 이야기라던지, 폴로와 노예간의 슬픈 로맨스 이야기러던지, 많은 인물 하나하나가 다른 어떤 주역들과도 비교해 빠지지 않는 현실감 있는 개성과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런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함에도 전혀 이야기가 난잡해 지지 않는 점은 정말 이 드라마의 큰 장점이다. 자신이 역사 이야기기와 잘 만들어진 영화를 좋아하는 성인이라면 이 드라마 꼭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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