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나테 울머에의해 쓰여졌으며 국내 마로니에북스에서 출판한 알폰스 무하는 아르누보라는 대명사를 창조해낸 거장 예술가 알폰스 무하(Alfons Mucha, 1860, 7, 24~ 1939, 7, 14)의 작품 세계를 가볍게 맛보기해 볼 수 있는 책자이다.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 알폰스 무하는 그 엄청난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유명세를 그리 달가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순수한 예술의 세계였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의 상업적 가치가 탁월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출판 예술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작가인 만큼 책자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크게 거부감이 없다. 그이 작품 세계와 관련한 글들도 흥미롭낟. 동서양,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쉽게 그 매력에 빠져버리고마는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은 나 역시도 무척 좋아한다. 작년에는 그의 작품전이 국내에서도 치루워져 무척 뜻 깊었다. 

 아래는 알폰스 무하에 관한 위키백과의 글과 생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알폰스 마리아 무하(체코어: Alfons Maria Mucha [ˈalfons ˈmuxa]1860년 7월 24일 - 1939년 7월 14일)는 체코의 화가이며 장식 예술가이다. 아르누보 시대의 대표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무하는 모라비아의 이반치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노래에 대한 재능 때문에 브르노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사랑했다. 1879년 으로 옮겨 무대 배경을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1881년 작업장에 불이 나서 회사가 문을 닫게 되자 그는 모라비아로 돌아가서 프리랜스로 장식 예술과 초상화를 그렸다. 미쿨로프의 카를 쿠헨 백작이 흐루쇼바니 엠마호프 성과 벽화를 부탁한 뒤에 그의 그림에 감명받아 뮌헨 미술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1887년에는 프랑스 파리로 가서 Académie Julian과 Academie Colarossi에서 미술을 배우면서 잡지와 광고 삽화를 그렸다. 1894년 Theatre de la Renaissance에서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를 알리기 위한 석판 포스터를 만들었는데, 무하의 아름다운 포스터는 큰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그는 이때부터 많은 회화, 포스터, 광고와 책의 삽화를 그리고 보석, 카펫, 벽지등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양식으로 이후 널리 알려지게 된다. 가장 유명한 그의 전형적인 회화는 젊고 건강한 여성이 네오클라식 양식의 옷을 입고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그림이다. 그의 아르누보 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이 흉내 내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런 상업적인 성공에 대해 부담스러워 했으며 보다 고상하고 위엄있는 예술과 고향에 대한 예술적 관심에 집중하고 싶어했다.

1906년 미국에 초대받아 1910년까지 있었다. 체코 공화국으로 돌아온 후에 그는 프라하에서 멀지 않은 즈비로그 성의 거대하고 크리스탈로 된 큰 방안에서 자신의 작품에 몰두하였다. 이후 18년 동안 그의 붓 아래에서 20개의 기념비적인 웅장한 작품이 나왔다. 슬라브 민족 역사에 있어서 변혁의 단계를 묘사한 것으로 특히 <조국의 역사에 선 슬라브인들> <불가리아 황제 시메온> <얀 후스의 설교> <그룬반트 전투가 끝난 후> <고향을 떠나는 얀 코멘스키> <러시아의 농노해방령>과 같은 작품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현대적 스타일로 프라하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들이었던 < 임페리얼> 그리고 자치의회 건물인 <유럽>의 인테리어 작업을 했다. 또한 곧 준공될 성 비투스 대성당의 메인 유리를 스케치했다. 1918년 독립된 체코 정부가 형성된 후에 무하는 <관제적 양식>인 체코의 기하학적 양식의 창조에 몰두했다. 그의 재능은 새 정부가 쓸 우표, 은행권, 문서등을 디자인했다. 1908년 그는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하고 프라하에 이를 헌정했다. 당시의 프라하에서는 모든 <슬라브 서사시> 작품 전체를 전시할 만한 갤러리를 찾을 수 없었다. 슬라브 서사시는 전쟁후에 일시적으로 모라비아 성에 일시적으로 출품하였다. 체코어로는 Moravsky krumlov로 1963년부터 관람이 가능했다. 그의 인생 말엽에 무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1930년 체코에서 그의 작품들은 낡은 기능주의 전성시대의 산물인 구식이며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강조한 작품으로 간주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번째 우표는 무하에 의해 만들어졌다. 무하의 애국심은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독일의 적으로 간주한 명부에 포함할 만큼 유명했다.1989년 3월 프라하가 독일에게 점령된 후에 게슈타포는 몇 번이나 고령에 다다른 무하를 검거해서 심문을 가했다. 그 결과 무하는 폐렴을 앓게 되었고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알폰스 무하는 비셰그라드의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무하의 작품세계는 프라하 박물관에 헌정되었고 슬라브 서사시 연작은 모라비아 크루믈에서 전시되었다. 또한 무하 삶의 초기 시대에 관한 전시회가 열렸던 <ИВАНЧИЦ>법원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세계의 많은 주요한 박물관과 화랑들에는 무하의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현재 예전의 박람회 단지에서 멀지않은 프라하의<СТРМОВК>공원에 <슬라브 서사시> 전시를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물의 건축 설계가 진행 중이다. 소행성 5122는 무하의 명성을 기려서 명명한 것이다.



 한 때 나이 먹고 홍대 미대를 들어가 보고자 한 적이 있다. 주위사람들(내 의지를 조용히 믿고 의지해 준 사람도 있지만)은 쓸데 없이 큰 돈 쓰면서 이미 졸업한 대학을 왜 또 들어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뭐 일단 해보고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시도 해 보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나로서는 어쨌든 무리해 보이는 시도를 했고 쓴 맛을 잔뜩 보았다. 수능 성적도 꽤 좋았고 그림도 어느정도 그렸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뭐 지금 생각하면  도리어 나한테는 좋은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 대학 사회에서 또 한 번 절망감을 느끼기보다는 말이다. 예술을 배움에도 그런 절망감을 느꼈다면 나는 한국사회을 정말 증오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어머니가 이 시절 그린 그림들을 모두 버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나마 이 세 장의 사진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황제 칼리귤라씨(대부분 카라카라라고 한다.) 흉상, 대체로 정신병자나 폭군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로마 곳곳에 대형 목욕탕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원래 목욕 문화가 발전하면 망국의 조짐이라고들 하던데....... 지금 보니 항아리 주둥이가 무척 어색하다. 내가 색감이 별로 좋지못한데 이 당시 괴상한 성격과 화려한 색상을 싫어하던 성격이 독특한 색감을 나타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색 분위기다. 그런데 왜 내가 수채화를 그리면 이렇게 누런 갱지같은 느낌이 나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전혀 의도한 바가 없는데......

 


 아리아스라는 발음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그렇게 부른다. 일반적으로 여러 한국 서적에서는 아리아드네(Aliadne)라고 표기하는데 이도 영문 표기법일 뿐 인 것 같다. 이 석고상은 그리스 신화 중 미노타우르스 이야기에 등장한다. 영웅 테세우스에게 반한 아리아드네는 아버지 미노스왕을 배신하고 뛰어난 기지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르스를 해치우고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그녀를 버리고 떠나버리고 만다. 그래도 이런 사건들이 원인이 되어 술의 신으로 유명한 디오니소스의 아내가되었으니 도리어 잘 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니 맥주병의 입체감이 정말 말그대로 병맛이다. 내가 그린 것 답지 않게 밝은 느낌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자신의 양아버지 시저를 살해한 배은망덕한 브루투스, 그러고 보니 첨단 무선 공유 방식인 블루투스(Bluetooth)와 한국식 발음이 비슷하다. 원래 누가 그린 그림을 모작하면서 시작된 그림이었지만 색감이라던지 , 여러모로 내맘대로가 되었다. 왠 석고에서 비취색상이 난다. 하하하!! 개인적으로 정말 싫어하는 로마 인물이다. 자신에게 그렇게 잘 해 주던 양아버지를 암살했다. 그것도 여럿이서 한 명을 말이다. 이런 악행에 대의나 명분이 끼어들 틈이 있을까? 뭐 역사야 쓰는 사람, 해석하는 사람 나름이니 자세한 그들의 인간관계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의외로 의붓아버지와 양아들 사이로 알려진 이들 사이에 모를 사정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된통 당하고 죄값은 치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꽃은 단 한번도 마음에 들게 그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낙서를 즐겨보지 않은 분들이 몇이나 될까요? 참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여러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낙서를 즐깁니다. 아이폰용 앱 Doodle Buddy아이폰의 터치 조작을 활용해 낙서를 즐길 수 있게 해 줍니다. 아기자기한 낙서에서 부터 상당히 높은 수준의 작품까지도 창작이 가능함으로 낙서하는 것을 자주 즐기시는 분들에게 적극 권장해 드리고 싶은 앱입니다. 
Doodle Buddy 는 한국 아이튠즈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미국 아이튠즈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손가락 하나로 다양한 낙서를 즐겨봅시다. 


 하얀 백지가 낙서욕을 자극합니다. 하단에 간단한 도구 버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활용해도 상당히 창조적인 낙서를 즐겨볼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브러시 도구입니다. 붓 느낌의 브러시와 분필을 비롯헤 번지는 느낌과 Extra 브러시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단의 슬라이드 버튼을 이용해 브러시 크기도 쉽게 변경할 수 있습니다.


  도장툴을 이용하면 다양한 이모티콘이나 스티커 느낌의 마크들을 낙서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브러시와 도장을 활용해 간단한 낙서를 해 보았습니다. 


 배경화면도 지정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이미지를 활용하거나 직접 아이폰으로 촬영된 사진, 또는 아이폰 앨범에 저장된 이미지들을 배경에 활용할 수 있습니다.


 배경이미지가 지정된 모습입니다. 

 낙서라는 행위가 단순히 시간 죽이기나 쓸모없는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특히, 어린이들의 창의력 발달에 큰 도움을 주는 창작 행위입니다. 유아교육과를 나와서 유치원 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의 말이니 어느정도 신뢰할 수 있겠죠? 요즘 많은 어린이들이 아이폰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문자나 게임을 하는데 활용하겠지만 이 처럼 창작력을 자극할 수 있는 앱에 취미를 가지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꿈꾸는 민화' 앱은 아이폰 화면으로 한국의 민화를 감상하고 관련 창작 이야기나 정보를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한국의 민화를 감상하기에 아이폰의 작은 화면이 아쉽기는 하지만 민화 이외에도 민화와 관련한 창작글과 관련 정보를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민화의 경우 그림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정도 안에서 약간의 재미있는 에니메이션을 가미해 또 다른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이런 앱 앞으로도 많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지의 느낌을 살린 사용자 환경이 눈에 부담도 줄여줄 뿐 아니라 보기에도 무척 좋고 편안합니다. 


 그림은 기본적으로 가나다 순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Gallery에서는 제공되는 민화들을 슬라이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민화와 관련한 자세한 정보와 함께 재치있고 기발한 재미있는 읽을거리도 제공합니다. 상단 우측의 별 버튼을 터치하면 Bookmark에 그림이 등록되 따로 모아놓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역시 전체화면을 이용해 그림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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